[취재수첩] 제값 안 쳐주는 건강보험 의료체계의 함정

입력 2023-01-19 17:48   수정 2023-01-20 00:33

“제품을 개발해도 한국 대신 미국 시장에 주력할 계획입니다. 한국은 건강보험 수가가 너무 낮은데, 이런 국내 수가가 기준 가격이 되면 해외 진출까지 힘들어집니다.”

국내 한 의료기기 회사 대표의 말이다. 이 회사가 개발한 의료기기는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등에서 시판 허가를 받았다. 기기를 활용하면 환자 통증을 줄여줘 의료 서비스 수준을 한층 높일 수 있다.

한국 개발자가 만든 국산 기기지만 정작 국내 환자들은 혜택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의료 비용이 지나치게 낮아 해당 업체가 한국에선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포장된 건강보험 제도가 기술 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 전 국민 건강보험 제도가 자리잡은 것은 1989년이다. 국민소득 수준이 높지 않은 시기였던데다 단 기간에 제도를 안착시키려다 보니 ‘저부담·저보장·저수가’를 기본 틀로 삼았다. 34년이 지났고 한국은 고속 성장했지만 시스템은 그대로다.

‘저수가’의 함정은 의료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혁신 신약, 최신 의료기술 등은 국내에서 제값을 받지 못한다. 한국의 낮은 약가가 ‘표준 가격’이 될까봐 국내에는 신약 출시를 포기하는 제약사도 늘고 있다.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 7개 약가 표준국의 혁신 신약 시장 진입 비율은 58%지만 한국은 35%다. 국내 환자들은 좋은 약이 나와도 쓰지 못한다는 의미다.

건강보험 급여 항목의 진료비가 너무 저렴하다 보니 보험 항목이 많은 필수 진료과는 외면받고 돈 되는 비급여 진료과는 승승장구한다. 성적 좋은 의사들은 ‘피안성(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등으로 몰린다. 필수과인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는 외면받는다. 소아 입원실과 야간 소아 응급실이 문 닫는 것도 이런 이유다.

‘저수가’의 폐해는 필수약 시장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최근 불거진 조제용 아세트아미노펜 공급난이 단적인 사례다. 저렴한 보험 약가에 맞추다 보니 원료의약품은 원가가 낮은 중국 인도에 의존하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 공급을 끊으면 제2, 제3의 의약품 대란을 피하기 어려운 구조다.

‘언제든 병원을 찾아 의사를 만날 수 있다’는 건강보험 제도의 장점에 취해 있는 사이 보건의료계 곳곳이 곪아가고 있다. ‘저수가’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근본적 변화를 논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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